심상옥 시집
지금 오는 이 시간
빛나는 시정신을 꼼꼼하게 엮어내는 ―
․1945년 일본 도쿄 출생
․경남여고, 이화여대 사범대학교육학과, 동아대학 교육대학원미술교육과 졸업,
․?한국수필? 조경희 선생 추천으로 수필등단(1982)
․?그리고 만남?으로 시 데뷔(1982)
․현재 한국현대시인협회 이사 및 대외협력위원회 위원장, 한국여성문학인회 부이사장, 한국문인협회 자문위원, 국제PEN한국본부, 계간문예작가회 이사, 문학시대 기획상임위원
푸른 시와 시인
지금 오는 이 시간
심상옥 시집
․시인의 말
현대와 과거가 함께 사는 골목에서도
마음을 흔드는 저 황금나무의 조용한 풍경을 본다
아련한 기억과 슬픔에서 문학을 마주하는
나의 인생도 저물어갈 무렵에
황혼을 부정하거나 미워하지 않는다
1982년에 시․수필집 ?그리고 만남?으로
문단에 나온 이후
열두 번째의 작품집이다
나른한 하루를 온몸으로 받으며 자연에 순응하고
긍정하는 생의 진실은 더없이 아름답다
아침 햇살엔 날개 펼쳐 눈부시고
저녁노을에 붉게 물든 마음을 고백한다
안녕하신가, 삶이여
머리채 나약하게 흔들려도
질긴 줄기는 알고 있는가
금빛 날개에
낡은 허물 벗어 새로운 내가 태어나는
‘지금 오는 이 시간’이야말로
밀려오는 환상의 나래 이미지로 채우면서
또 다른 세계로 나아가야 한다
2018년 가을
심상옥
․차례
․시인의 말
․심상옥의 시세계 ―․유성호
1. 그 여름의 끝
삶의 속도 ―․12
생각은 오랜 업業 ―․13
나에게 묻는다 ―․14
마 중 ―․16
예이츠가 모드곤에게 ―․17
세상을 읽는 방식 ―․18
일상에서 일생까지 ―․19
흔들리면서 하루를 ―․20
손 ―․22
그 여름의 끝 ―․24
억새풀 설법說法 ―․25
시낭송 ―․26
안녕하신가, 삶이여 ―․28
그래도 될까 ―․30
침 묵 ―․31
2. 옛 수첩에서
어느 시인의 말 ―․34
어느 우화 ―․36
얼마나 ―․38
옛날 같은 여름이 ―․39
시네마 천국 ―․40
간 격 ―․41
옛 수첩에서 ―․42
겁 없이 겁도 없이 ―․44
왜 몰랐을까 ―․45
위기의 날들 ―․46
일곱 번째 맹세 ―․48
입 ―․49
자연에 기대어 ―․50
적막하다 ―․51
나는 ―․52
3. 하루가 길다
지금 오는 이 시간 ―․54
그 겨울 ―․55
저 황금나무 ―․56
하루가 길다 ―․58
한 사람의 말 ―․60
항아리 ―․62
휴 식 ―․63
걸어가는 사람 ―․64
경험카드 ―․66
귀여 들어라 ―․68
그때가 소중하다 ―․70
그의 목표 ―․71
나그네새 ―․72
나의 세계는 사물들 곁에서 시작한다 ―․74
나는 움직인다 ―․76
하루도 긴 여름 ―․78
4. 맞먹는 일
나의 도예법 ―․80
넋 새 ―․81
나의 화장법 ―․82
당신의 전파 ―․84
되풀이 일기 ―․86
노숙 메모 ―․88
때때로 ―․89
마음에도 문이 있어 ―․90
맞먹는 일 ―․92
먼 동 ―․93
봄이 되니 알겠다고? ―․94
비비추 ―․96
먼 것과 가까운 것 ―․98
문제는 문제다 ―․99
사람들 ―․100
1. 그 여름의 끝
〈삶의 속도〉
중앙선을 넘어 달렸나 보다
중앙선을 넘다니!
자칫 사고로 이어질 뻔한
삶의 중앙선이?
내 삶의 속도는 언제나
이차선만을 고집했다
과속이나 위반을 하지 않는
일정한 삶의 속도
늘 그 자리에 서 있는 가로수처럼
무료함이 땅속으로까지
뿌리를 내려버린 것 같다
안전지대에서 나는 안전했다
〈생각은 오랜 업業〉
새마다 하늘이라는 시인이 있고
꽃마다 한 단면이라는 시인도 있는데
삼월은 마음을 움직이게 하는 달*이라고
그들은 말하네
그리움에도 스위치가 있다는 시인이 있고
꽃 앞에 서면
적막한 게 싫다는 시인도 있는데
오월은 오래전에 죽은 이를 기억하는 달*이라고
그들은 말하네
내일부터는 행복한 사람이 되겠다는 시인이 있고
과거는 가장 뛰어난 예언자라는 시인도 있는데
십일월은 모두가 사라진 것은 아닌 달*이라고
그들은 말하네
*인디언식 명명법
〈나에게 묻는다〉
노을이 자라면 무엇이 될까
노을 지는 나이에
내가 나에게 묻는다
붉은 한숨을 토하겠지
한숨을 쉬면 어디까지 갈까
한숨 쉬는 나이에
내가 나에게 묻는다
마음 따라 가겠지
마음이 자라면 무엇이 될까
마음뿐인 나이에
내가 나에게 묻는다
마음이 있으니까 사람이 보이겠지
사람이 보이면 어떻게 될까
사람 보이는 나이에
내가 나에게 묻는다
오래 사랑한 사람을 놓아주기로 결심한 사람처럼
나는 울었다
〈마 중〉
어려울 때 힘들 때
마음 나눌 친구 있나요?
그런 질문 받았을 때
금방 떠오르는 사람 있다면
그는 절망을 헤아려본 사람이다
아플 때 슬플 때
의지할 사람 있나요?
그런 질문 받았을 때
금방 생각나는 사람 있다면
그는 희망을 헤아려본 사람이다
마중물은 땅 속의 물을 부르기 위해
더 멀리 마중해야 한다
〈예이츠가 모드곤에게〉
나뭇잎 자라듯 쉽게 사랑하라고
둑 위에 풀 자라듯 쉽게 살라고
너는 내게 말하지만
인생에서 너무 늦은 일 따위는 없다고
너는 거듭 내게 말하지만
아름다움은 아는 것이 아니라
사랑하는 것이라고
나는 네게 말하네
모드곤이여
모든 나의 곤궁이여
너를 탐한 30년 동안
너에게 나는
반쯤 태어난 사람
내가 추락하는 동안
가장 강력하게 살았다고
말해 주마
수양버들 공원에 내려가, 지금
〈세상을 읽는 방식〉
새들이 하늘을 날아갈 때
좋은 계절이 올 것만 같고
비 맞고도 파초잎 젖지 않을 때
가슴에 비 내려도
옷은 젖지 않을 것 같아
이런 저런 것들을 바라보고
그냥 어리둥절해 하다
세상은 불완전하기에
풍요롭다는 말 생각하네
이것이
세상을 읽어내는 방식
나는 내가 기울어질 때
너를 읽어내는 힘으로
다시 살아간다
참 오래된 일이다
〈일상에서 일생까지〉
우두커니 서 있는 나무가 군락을 이루면서도
남의 가지에 제 가지를 얹지 않듯이
일출에서 느끼는 하루의 장엄함이
일몰의 절경을 만들어내듯이
소리를 잘 들어주는 귀명창이
명창을 만들어내듯이
시를 잘 읽어주는 독자가
명시를 만들어내듯이
흙을 찾아 떠도는 발길이
도예장인을 만들어내듯이
난 이제부터 뭘 하지?
흔들리면서 하루를
조금씩 기차는 흔들렸다
조금씩 마음도 흔들렸다
세상은, 삶은 언제나 흔들렸다
바람에 흔들리고
일에 흔들리고
사람에 흔들렸다
〈흔들리면서 하루를〉
흔들리지 않으려고 하루를
더 이상 비를 맞지 않으려고
그 순간 그곳을 단단히 붙들기 위해
너와 나는 마주 서 있다
나는 너와의 적정한 관계 속으로
걸어 들어 간다 바람이 불 때마다
흔들리면서 앞으로 나아간다
우리가 몇 번이나 더 저 기차와
바람과 저녁놀과 가을을
흔들리면서 마주볼 수 있을까
조금씩 열차는 흔들렸다, 조금씩 마음도
흔들렸다 왜 세상엔 미는 사람만
있고 당기는 사람은 없는 것일까 그리고
왜 이 기차는, 삶은, 세상은
언제나 흔들리는가, 그렇게 하루를
〈손〉
도자기를 만들 때
손은 연장 중의 연장이다
흙을 만질 때마다
왼손의 온기가
오른손으로 번진다
흙 한 점
물 한 방울
불타는 소리
어릴 때 나는
아무것도 바라지 않는다
아무것도 두려워하지 않는다
나는 자유다*
백절불굴의 의지가
가마에서 불탄다
만 개의 자기가 빛나도
반드시 크게 돋보이는 것이 있다
나는 계속
손을 잘 쓸 생각이라고
떠오른 해를 두고
맹세할 생각이다
*카잔차키스 묘비명
〈그 여름의 끝〉
뜨겁게 머물다
문득 끝나 있는 여름
너는 나를 화나게 하지 않고
부끄럽게 했다
나는 너를 슬프게 하지 않고
아프게 했다
그 여름으로 나는
한 겨울을 견뎠다
〈억새풀 설법說法〉
바람에 흔들리는 억새풀이
백발의 노승같다
독경하듯
고古, 집集, 멸滅, 도道, 고집멸도 흔들린다
진기한 새
괴이한 돌
이상한 풀이
그의 다른 이름이었을 때
이 세상에서 가장 강한 사람은
다투지 않는 사람이라고 설법했다
억새풀 설법이었다
〈시낭송〉
러시아 시인 예푸트센코는
광장에서 시낭송을 하면 사람들이
구름처럼 몰려들고 흑인시인 랭스턴 휴스*는
지방도시 순례 시낭송으로 흑인들의
영혼 일깨워 주었다
이 세상 어디에
까닭없이 울고 있는 사람 있다면
나는 그를 위해 시낭송을 할 것이다
이 세상 어디에 까닭없이 웃고 있는 사람 있다면
나는 그를 위해 시낭송을 할 것이다
이 세상 어디에
까닭없이 슬픈 사람 있다면
나는 그를 위해 시낭송을 할 것이다
이 세상 어디에 까닭없이 잊혀진 사람이 있다면
나는 그를 위해 시낭송을 할 것이다
누군가를 위해
까닭없이 까닭도 없이
*랭스턴 휴스(1902∼1967): 미국의 시인, 소설가, 극작가이며 인종차별에 저항하는 시를 많이 썼다.
〈안녕하신가, 삶이여〉
삶 속에는 왜 그런가요?
물을 수 없는 것들이 있다는 걸 몰랐다
나는 몰랐다
삶 속에는 어떻게? 라고
물을 수 없는 것들이 있다는 걸 몰랐다
삶은 사람마다 사는 방법이 다르고
삶에는 물음표만 있고 마침표가 없다는 걸 몰랐다
나는 정말 몰랐다
삶은 자신이 써야 할
자서전이며 반성문이란 걸 몰랐다
나는 정말로 몰랐다
삶은 누구도 대신해줄 수 없는 고통이란 걸
알기 전까지는
삶은 견디는 것이 아니라 살아내는 것이란 걸
알기 전까지는
〈그래도 될까〉
공허한 인간의 말보다
폐허 속의 한 포기 풀이
더 아름답다고 말해도 될까
말은 공중에서 흩어져버리지만
풀은 땅 속에 뿌리를 내린다고 말해도 될까
산은 들이 좁을까 저어해서
저 멀리 솟아 있다고 해도 될까
가장 척박한 곳에서 자라난
생명나무가 웃음이라고 말해도 될까
너만의 애교가 너의 종교라고 말해도 될까
그래도 될까
〈침 묵〉
꽃의 매력 가운데 하나는
그에게 있는 아름다운 침묵이다
말 안하는 것이 침묵은 아니다
말보다 더 말같은 말
그것이 침묵이다
나무의 매력 가운데 하나는
그에게 있는 푸른 침묵이다
입을 다무는 것이 침묵은 아니다
침묵보다 더 말같은 말
그것이 말의 침묵이다
사람의 매력 가운데 하나는
그에게 있는 사랑의 침묵이다
소유하는 것이 사랑은 아니다
희생보다 더 희생 같은 사랑
그것이 사랑의 침묵이다
2. 옛 수첩에서
〈어느 시인의 말〉
미완성이 절정이라고 어느 시인이 말했을 때
내 미완성도 절정일까 의아했다
천불천탑 세우기
내 시 쓰기는 그런 것이다 어느 시인이 말했을 때
탑 하나 세우지 못한
내 시 쓰기가 부끄러웠다
씹다 뱉는 희망보다 상처 받을 수 있다는 건
얼마나 큰 선물인가 어느 시인이 말했을 때
상처가 고통이라고만 생각한 나는
내 상처가 축복처럼 느껴졌다
눈물자국 때문에 속이 훤히 들여다보이는 사람들과
따뜻한 국수가 먹고 싶다고 어느 시인이 말했을 때
눈물자국 들키지 않으려고
사람들을 밀어내던 내가 어리석기만 했다
나이가 들면
마음껏 울지도 못한다는 말에
시인의 말을 보태는 밤
〈어느 우화〉
늙은 사자가 여우더러
동굴로 들어가자고 말하는 사이
영리한 여우는
동굴 앞 땅을 자세히 살폈다
들어오라는 사자의 말에
여우가 거절했다
당신 집으로 들어간
동물들 발자국은 많이 보이나
밖으로 나온 건 하나도 없으니
다른 동물들이 나올 때까지
바깥에서 기다리고 있겠다고 했다
영리한 여우는
다른 동물들의 죽음을 보고
위험을 알았던 것이다
지혜로운 사람은
남의 불행을 보고
위험을 안다는 어느 우화
〈얼마나〉
‘만약이라는 약’이 있다고
누가 놀라운 말을 하고
‘그래도島라는 섬’이 있다고
또 누가 놀라운 말을 하지만
꿈같은 소리 마라
나에게는
‘다짐이라는 짐’ 밖에 놀라운 것이 없으니
‘새봄이란 말’이 있어도 ‘새 가을이란 말’은 없다고
누가 다시 새로운 말을 하고
‘깊은 밤’은 있어도 ‘깊은 아침’은 없다고
또 누가 다시 새로운 말을 하지만
모르는 소리 마라
나에게는
‘함정이라는 정’밖에
새로운 것이 없으니
〈옛날 같은 여름이〉
여름이면 생각난다
강변 모래톱에 찍힌
이집트 상형문자 같은
새들의 발자국
여름이면 또 생각난다
돛단배 밀던 저녁노을과
종이배 접어 띄우던
강물 위 낮달
여름이면 다시 생각난다
갈대소리 물새소리에
마음이 먼저
옮겨 적은 문장들
아, 옛날이어 너는
자꾸 내게로 오는구나
그 시절 모든 게 어려웠던 때
〈시네마 천국〉
영화 속 우체부 마리오가 네루다에게 남긴
마지막 선물은 내 오랫동안 잊고 있었던
것들을 떠올리게 하였습니다
‘바위 위에 철썩이는 파도소리
평화로이 울러퍼지는 성당의 종소리
절벽에 부는 나지막한 바람소리
아직 태어나지 않은 아이의 심장박동소리’
네루다가 한동안 머물렀던 섬의 아름다움을
낱낱이 담은 테이프를 들으며
네루다는 어느새 두 눈이 젖었습니다
참, 인간으로 살기도 힘들었습니다
〈간 격〉
밀봉과 개봉 사이
고배와 축배 사이에 간격이 있고
질문과 대답 사이
물음표와 마침표 사이에 간격이 있네
가치와 사치 사이
생각과 행동 사이에 간격이 있고
아침과 저녁 사이
꿈과 현실 사이에 간격이 있네
나무와 나무 사이
사람과 사람 사이에 간격이 있고
이곳과 저곳 사이에 간격이 있네
모두가 간격을 말할 때
너와 나 사이에도
간격이 있다는 걸 알겠네
간격이 있어야
더 잘 보이는 타인들 사이
〈옛 수첩에서〉
어제보다 나은 오늘이
나와 함께 놀자고 한다
어제는
남은 시간을 깜빡 놓쳤다고
이제는
남 보란 듯 말고
나 보란 듯 살라고 한다
오늘보다 나은 내일이
나와 함께 놀자고 한다
오늘은
어제를 모르게 놓쳤다고
이제는
내일처럼 살라고
나 보란 듯 살라고 한다
그리고 아주
오랜 시간이 흐른 다음
옛 수첩은
나를 끌어당기리
언젠가 너를 보낸 적 있다
〈겁 없이 겁도 없이〉
내가 여름 들판처럼 초록이었을 때
겁 없이 쓰던 말
내가 겨울나무처럼 마른가지였을 때
겁나게 나를 겁 주었다
겁 없이 쓰던
죽고 싶다던 그 말
쓰기에도 이제 겁이 난다
봄 가을 없이
그동안
너무 많은 말을 해버린 탓이다 겁도 없이
겁 없던 말 쓸어담을 주머니가 없어
나는 겁나게 주먹을 쥐었다
그 까닭을 알 듯하여
〈왜 몰랐을까〉
마음이 혼자일 때
나는 지금껏 ‘너뿐이야’ 하고 믿어지는
한 사람을 가지는 것이
그토록 아름답게 보였던
‘높고 편한 자리’보다 더
소중하다는 것을 모르고 살아왔다
왜 그랬을까 왜 몰랐을까
이제야 아는 걸
그때도 알았더라면
마음이 먼저 마음에 귀 기울였으리라
분명코 사랑할 때 많이 사랑했으리라
그렇게 될 것은 그렇게 된다는 걸
슬픔에 비길 만한 진실은 없다는 걸
모르지 않았을 것이다
〈위기의 날들〉
버드케이지란 나무는 약간의 그늘만 만나면
뿌리를 내리고 이슬을 받아 살아간다고 한다
노랑부리할미새는 기린의 등에 매달려
진드기를 잡아먹고 살아간다고 한다
휘파람을 불지 않고는 저 언덕을
내려갈 수 없었을 것이라고 너는 말한다
이름 모를 풀에 이름을 지어주고 싶은 마음이
나를 살아가게 했다고 나는 말한다
꽃을 본 적도 없이
어느 사이 꽃들이 분분하게
흩어져버렸을 때
어제와 같은 오늘을
살지 않겠다고 다짐하던 날들이
내게는 있었다
시련의 끝에서 보면
우리의 웃음은
눈물에서 태어났다고 한다
〈일곱 번째 맹세〉
월요일은 어둔 밤을 비추는 달처럼 살아가겠다
화요일은 불같은 일을 조심하며 살아가겠다
수요일은 낮은 곳으로 흐르는 물처럼 살아가겠다
목요일은 사람에게 유익한 나무처럼 살아가겠다
금요일은 말을 천금같이 하며 살아가겠다
토요일은 오물도 덮어주는 흙처럼 살아가겠다
일요일은 찬 것도 데워주는 따뜻한 햇빛처럼 살아가겠다
오늘의 부름에 응답하며 살아가는 월화수목금토일
〈입〉
제 입 속에
어린 새끼를 미소처럼 머금은
물고기의 입
어린 새끼 입으로
제 살을 뜯어먹게 하는
가시물고기
이런 날은
‘어머니’를 쓴 고리끼도
잠시 입을 다물 것인데
내 말의 반은 입
그 반은 침묵
겨우 밥이나 머금은
나의 입은 할 말을 잃을 것이네
〈자연에 기대어〉
숲 속의 빈 터로 가려 하네
가서 다람쥐와 놀려 하네
가서 새들이 하는 말에 귀 기울이려 하네
무언가 기대어 살 것이 필요해
현재는 차갑고
심장은 뜨겁거든
숲 속의 오솔길로 가려 하네
가서 바람소리 귀담아 들으려 하네
가서 물소리에 젖은 땀 씻으려 하네
무언가 기대어 살 것이 필요해
머리는 차갑고
가슴은 뜨겁거든
〈적막하다〉
솔바람 서로 부대끼는 소리 적막하다
환한 축복같던 목련지는 소리 적막하다
구성진 새울음이 멀어져가는 소리 적막하다
숨어서 우는 풀벌레 소리 적막하다
수직으로 내리는 겨울비 소리 적막하다
소리도 없이 눈이 휘날리는 소리 적막하다
아무것도 확실한 게 없다는 탄식소리 적막하다
지나간 천년보다 하루가 더 길다는 절박한 소리 적막하다
마음의 맷집이 느슨해지는 소리 적막하다
내가 원하는 것들이 내게서 멀어지는 소리 적막하다
내 발걸음이 나를 옮겨가는 소리 적막하다
한 번도 내 것이 아니었던 것들이 적막하다
〈나는〉
나는 고통과 헤어지기 위해
아름다움을 포기했다
나는 스스로 속이지 않겠다는
마음을 가지려고 산을 보았다
나는 질문을 그만두지 않으려고
사는 것에 길들지 않았다
나는 낙오되어야 살아남는다는
뚜어뚜어의 말을 믿었다
나는 도자기를 빚으려고
흙을 절단 내었다
절단 내야 나는 나였다
나는 도자기다
〈지금 오는 이 시간〉
바람은 종을 때리고
추억은 가슴을 친다
종소리 멀리 퍼져 범종이 되나
추억은 인생이 지나는 길목에서
여린 휘파람소리를 낸다
풀밭에 누워
시를 외던 시절은 지나간 것이냐
지금 오는 이 시간은
잃어버린 것들을 만나러 서성인다
또 한 편의 시절이 재생되는 것이냐
나는 하루를 적지 않기로 한다
〈그 겨울〉
그 겨울 가슴에 돌을 얹고 생각해
보았습니다 손을 얹고 생각할 때보다 한 차례
반성이 무겁고 살얼음에도 깨어지지 않았습니다
그 겨울 나는 마음 깊은 곳에서
있었습니다 그 겨울 나의 심장은 어느
때보다 빨리 뛰고는 하였습니다
세상에서 제일 무거운 것이, 제일 무서운
것이 나를 깨울 때, 생각을 눈덩이처럼 굴려보았습니다
세상은 그렇게 굴리기를 잘 하는 사람의 편은
아니다 아니다 할 때, 나의 겨울은 끝이 났습니다
〈저 황금나무〉
너, 음악이 뭔지 아니? 우주에 우리 말고
다른 무엇이 있음을 전하는
신의 말씀이지
살아 있는 모든 것들을 이어주는 화음의
결합체야 심지어 별까지
너, 도예가 뭔지 아니? 우주에 대지 말고
다른 무엇이 있음을 전하는
인간의 오브제지
죽어가는 모든 것들을 이어주는 새로운
표현방법이야 심지어 슬픔까지
누가 부르는 것 같아
그것을 쓰는 거야
모든 이론은 회색에 회색을 덧칠하는 것
오직 살아있는 것은
저 생명의 황금나무*
*파우스트에서
〈하루가 길다〉
오랜만에
천둥소리 듣는다
가슴이 다시 뛰었다
네가 내 꿈이었던 그때처럼
나는 기쁘고
꿈꾸는 것이
세상을 이기는 방법이라고
뛰는 가슴으로
나는 또 말하네
누가
내 심장 위에다
천둥소리 옮겨놓았나
여전히 질문이 많은 네가
아직 내 속에 있다는 증거
오랜만에
여운이 꿈결 같았다
내일부터는
행복한 사람이 되어야겠다*
*하이즈시에서
〈한 사람의 말〉
사람은 울면서 태어나고
고통 속에서 살다
실망하며 죽는다고 누가 말했을 때
매일 매일을
인생의 전부인 듯 살라고 누가 말했을 때
산다는 건 호흡하는 것이 아니라
행동하는 일이라고 누가 말했을 때
사람이 괴로운 건
관계 때문이라고 누가 말했을 때
이 세상에서
죽기보다 더 힘든 건 사는 일이라고 누가 말했을 때
잘 살려고 하지 말고
덜 불쾌하게 살라고 누가 말했을 때
어떻게 사나 근심만 늘었는데
꽃밭에 서면 꽃의 종류만큼
많은 웃음소리가 들린다고
네가 처음 말했을 때
그때서야 알았네
내가 얼마나 말이 고픈지, 얼마나 아픈지
〈항아리〉
- 「소주병*」 조調로
항아리는 속에다
채운 것을
모두 비운다
속은 비어 있지만
언제나 배는 부르다
달이 몹시 밝던 밤
하늘 향해
무릎 꿇은 어머니를 보았다
다가가 보니
장독대에 엎어 놓은
빈 항아리였다
*공광규의 시
〈휴 식〉
우리는 늘 바쁘다
바쁘다 바빠 하면서
이 일 저 일로 뛰어다니고
수없이 세상으로 들어가
물에 밀리고
불에 그을린다
어둠과 빛의 행간에서
그림자에 싸여 어두워진다
나 역시
누군가의 실패한 문장일 수도* 있다는 생각에
오늘은 많이 울고 나서
좀 쉬어야겠다
보도블록 사이에도 들풀은 자라니까
세상은 살아낼 수밖에 없는 곳이니까
*김남조 시에서
〈걸어가는 사람〉
부러질 듯
무너질 듯
넘어질 듯하면서도
결코 걸음을 멈추지 않는
걸어가는 사람
(이것이 인생의 눈부신 차례)
쓰러질 듯
엎어질 듯
자빠질 듯하면서도
결코 걸음을 멈추지 않는
걸어가는 사람
(이것이 삶의 엄숙한 순서)
꽃심고 김매듯이
하루 하루
밉게 보면
잡초 아닌 것이 없고
곱게 보면
꽃 아닌 게 없을 것이나
아무튼 우리는
그대로 걸어가는 사람
다른 곳에 닿기 위해
두 다리로 저어가는
한 세상의 사공들
〈경험카드〉
우리는
인생이라는 매장에서
경험을 쇼핑하는 사람들
각자도생의 경험카드로
언제나 몇 번이라도
늘 혹은 때때로
우리는
삶이라는 장터에서
체험을 기록하는 사람들
각자도생의 체험카드로
언제나 몇 번이라도
늘 혹은 때때로
산다는 건 날마다
꿈을 하나씩 지우는 일이라는 생각
날마다 일을 한 건씩 치우는 일이라는 생각
이것이 우리의 경험카드
각자도생의 체험카드
〈귀여 들어라〉
눈꺼풀을 내리면 풍경이 닫힌다
당신도, 당신이 앉아 책 읽는
벤치도 닫히고
멀리 단풍 옷 입은 산도 닫힌다
귀가 눈보다 덜 차별적인 것은
닫히지 않고 열려 있기 때문이다
마음을 주지 않아도
내 귀는 가을을 우는 풀벌레 소리를 듣는다
풀벌레 소리에 마음을 더하면
당신이 건넸던 약속의 말
당신이 들려주었던 아픈 이야기
시리아 난민의
절망에 찬 절규도 들린다
그러니 귀여 들어라
세상의 소리를
귀여 제대로 들어라
세상의 모든 소리를
그때가 소중하다
새 길이 옛 길을 내려놓을 때
추억을 통해 인생이 지나갈 때
바람이 손가락에 잡힐 때
그때가 소중하다
새날이 지난날을 읽을 때
미로를 통해 방황이 끝날 때
구름이 생각 끝에 머물 때
그때가 소중하다
첫 질문이 다음 페이지를 쓸 때
시작을 통해 끝이 서럽지 않을 때
물결이 마음결에 닿을 때
그때가 소중하다
그의 목표
어릴 때부터 평생 동안
구두를 닦은 사람
절대광이 그의 목표였다
어릴 때부터 평생 동안
노래를 부른 사람
절대음이 그의 목표였다
어릴 때부터 평생 동안
소리를 한 사람
절창이 그의 목표였다
나그네새
발은 나그네
눈은 구경꾼
내가 밟은 땅
모두 다 길이 되지 않고
내가 본 풍경
모두 다 절경이 되지 않는다
발 한 쪽이 비틀, 한다
땅 밟고 서서
땅을 내려다본다
밟고 밟힌 발이 바닥을 친다
누구든 바닥은 있는 것이지
발이 바닥을 칠 때
그때 탁, 차고 오르는 거야
나그네새 한 마리
땅을 차고 오른다
두 발이 하늘로 들린다
나의 발은 나그네
나의 눈은 구경꾼
나의 세계는 사물들 곁에서 시작한다*
단 하루만이라도
TV를 끄고
인터넷을 접고
스마트 폰을 집에 두고
울창한 숲길을 찾아서 떠난다면
오직
햇빛과 바람과 물과 새소리만으로
하루를 채울 수 있다면
틈만 나면 걷고
틈만 나면 하늘 보고
다람쥐와 나뭇잎과 별과 달만으로
나만의 월든을 만든다면
그곳에
내가 버려두고 온
야생적 자아가 있을까
들리지 않는 듯 들리는
낯선 소리 들을 수 있을까
사물들 곁에서 시작하는 나의 세계
*릴케
나는 움직인다
구구절절 열 마디 말보다
한 줄의 이모콘이
나를 움직인다
천 마디의 말보다
한 숟갈의 밥이
가난을 움직이듯이
너는 어째서
날마다 이토록
나를 움직이느냐
여전히
나보다 낮은 곳에 물이 있고
여전히
나보다 높은 곳에 산이 있고
여전히
나의 고통은
누구도 대신해 줄 수 없는데
너는 어째서
날마다 이토록
창밖의 고목 말고
고목의 새순을 보아버리느냐
구구절절 나를 움직이느냐
하루도 긴 여름
마음에 손잡이가 있으면 좋겠다
손잡이를 잡을 때마다
마음은 바닥을 쳐도
너를 생각하지 않고는
하루도 긴 여름이었다
그리움에 스위치가 있으면 좋겠다
스위치를 누를 때마다
생각은 구름처럼 뿌리가 없어도
너를 잊지 않고는
하루도 긴 여름이었다
내가 마지막으로
마음을 잡았을 때
내가 누른 것은
스위치가 아니라
너라는 긴 그리움이었다
4. 맞먹는 일
나의 도예법
물고기는 잘 때 눈을 뜨고 자고
돌고래는 깨어있는 채 잠을 잔다는데
잠을 막기 위해 은행잎을 달여먹는
수행자도 있다는데
흙 빚으며 나는 무엇으로 사나
겉은 가시로 무장한 선인장도
속은 찝찔한 눈물 같은 물로 가득차 있고
모래사막을 걸어가는 낙타는
눈이 늘 젖어 있어 따로 울지 않는다는데
슬픔만한 거름이 없다고 말하는 시인도 있는데
불가마 앞에 앉은 나는 무엇으로 사나
파괴함으로써 나는 창조한다
그것이 나의 도예법이다
넋 새
꿈 얻지 못한 네 영혼이
새가 되어 내 몸 속에 들어와
넋새가 되었구나
언제부터 너는
구름을 통해 하늘을 이해하고
바람 속에 쉬는 이유를 알았느냐
나도 한때
가벼운 날개의 삶을
살고 싶을 때도 있기는 있었다만
망연하고 자실하여
나는 그만
가만히 네 뒤로 가서
오늘은 참다참다 터지는 울음처럼
시시비비 울고야 말겠구나
나의 화장법
이마에 주름이 생겼을 때
나는 상냥함이라는 크림을 바르고
입술에는 침묵이라는 립스틱을 발랐지요
눈이 침침해졌을 때
나는 정직이라는 아이크림을 바르고
청결에는 미안이라는 비누를 발랐지요
피부가 거칠어졌을 때
나는 미소라는 로션을 바르고
좋은 살결 만들려고
성실이라는 영양제를 발랐지요
이것도 바르고 저것도 바르고
나는 이해라는 스킨을 발랐지요
그중에서도 가장 향기로운 것은
용서라는 향수였지요
나의 화장법이 효과가 있었는지
아직도 내 영혼에
주름살을 늘리진 않았지요
당신의 전파
나는 아직도
당신의 전파를 받습니다
마음속에 세운 수신탑이
세월이 흘러도 나이를 먹어도
생의 다음 페이지를 넘기게 합니다
당신은 꿈꾸었지요
우리는 모두
무엇엔가 기대어 살 것이 필요하니
내일부터는 행복한 사람이 되자고
천리향나무 아래서
적막하게 웃었지요
다 좋은 빛과 바람이지만
저쪽 바람 속에 있는 당신
당신을 만나고 돌아올 때
나는 당신을
외투처럼 걸치고 천천히 걷습니다
당신이 나를
유일한 당신이라 부를 때까지
활짝 핀 미소처럼
오직 나는
나이기만 하겠습니다
되풀이 일기
산은 그 자리 그대로 있는데
사람들은 오르락내리락 하네
나무는 그 자리 그대로 있는데
사람들은 바람처럼 흔들리다 말다 하네
꽃은 그 자리 그대로 피는데
사람들은 나비처럼 이 자리 저 자리 옮겨 다니네
흐르는 물은 앞을 다투지 않는데
사람들은 다투면서도 흐르지 못하네
그 자리에 그대로
그것보다 더 못 말리는 되풀이가 있을까
움직이는 것들 그보다 더
반복되는 되풀이가 있을까
아무려면 어떤가
내가 바라보는 자연은
온전히 나만의 것
그 자리 그대로
나도 내 자리에 그대로
노숙 메모
런던의 뒷골목에서 하룻밤 홈리스 체험을
한 윌리엄왕자는 그것이 제대로 노숙체
험을 하는 게 아니란 생각이 들었다고
한다 하룻밤이 지나면 결국 집으로 돌
아가 좋은 침대에서 편안히 잘 것이지
만 그들은 그 생활이 끝나지 않을 것
이라고 말했다 한다 정처없이 떠돌며 잠드는 일을
반복하는 생활이 얼마나 외로울지 상상
하는 것 그것만으로도, 험난한 세상살이
에 대해 이해하는 것 그것만으로도
크게 도움이 되었다고 말했다 한다 하루
살이 노숙을 탓하듯이 그날은 밤하늘이
울부짖었다고 한다 그들은 우주의 젖을
훔쳐 먹고 연명했다고 한다
때때로
왜목마을에 가서
일출과 일몰을 함께 보았다
그 황홀이
까닭 모를 괴로움을 날려버렸다
사랑이 때때로
예술을 파괴하듯이
적멸암에 가서
적막과 번뇌를 함께 느꼈다
그 반복이
까닭모를 불안을 잠재워 버렸다
사랑이
때때로
무위(無爲)를 남기듯이
마음에도 문이 있어
별들이 드리운 밤을 눈앞에 보며
나는 처음으로
세상의 다정한 무관심에 대해
마음을 열고 있었다*
초록나무 위에서 지저귀는 새소리를 들으며
나는 처음으로
사람들의 무관심에 대해
마음을 열었다
마음에도 문이 있어 활짝 열었더니
닫혀 있는 벽도 활짝 열렸다
나는 처음으로
한 떨기의 별과
한 번의 새 소리 사이에서
꽃같은 미소를 자아내었다
*카뮈의 「이방인」에서
맞먹는 일
‘프로방스의 산들’이란 그림을 그린 세잔느는
그 산의 대리석을 묘사하면서 시인 카스케에게
‘나는 대리석의 향내를 그리려고 애쓰고 있다’고
했다 한 작가가 고유한 표현양식을 가진다는
것은 한 생애를 가지는 것과 맞먹는 일이다
많은 그림을 본 뒤 앙드레 모로아는 ‘위대한
화가는 많았지만 영혼을 건드리는 화가는
없었다‘고 했다 풀 한 포기와 나무 한 그루가
이루어낸 세상은 한 나라와 맞먹는 일이다
좋은 책을 읽은 뒤 너는 ‘한 권의 책이
내 인생을 바꿔놓았다’고 했다 바라보는
법을 배운다는 것은 한 절경과 맞먹는 일이다
먼 동
아침에 깨어나 창가에 다가가
먼동이 트는 것을 바라본다
산 능선이 뚜렷해지고
새들도 시작이다, 지지배배
나는 문득
지난날 나의 모든 거짓들을
그리고 낡은 습관들을
뭉개버리고 싶어
나도 새처럼 지지배배
경이로 가득 찬 새벽기운을 놓치지 말아야지
새로운 삶의 비밀을 발견하기 위해
나는 오늘도
창가에 다가가
먼동이 트는 것을 바라본다
날이 밝아올 무렵의 동쪽을
봄이 되니 알겠다고?
봄이 되니 알겠다고?
소나무는 왜 늘 푸른지
물은 왜 아래로만 내려가는지 알겠다고?
그런데 왜 너는
내가 나에 이르름이 이름이라는 말에
고개를 떨구나?
봄이 되니 알겠다고?
나무는 왜 바람이 흔들어도
흔들리면서 그 자리에 서 있는지
우리는 왜
물음은 많고 대답은 궁한지 알겠다고?
그런데 너는 왜
달빛에 마음 내다걸고*
화들짝 놀라나?
이 세상에는
그 무엇도 단순한 게 없기 때문이지
피우다 피우다 터지는 게으름처럼
참다 참다 터지는 울음처럼
그래, 참을 수 없는 존재의 무거움 때문이지
그런데 너는 왜
다소간 잠을 설치나?
*이문재의 시에서
비비추
비비추 ㅡ 길게 발음하고 나면
어디선가
비비추 비비추 새소리가 들리는 것 같고
지나가는 바람에
날개 부비는 소리 같기도 해서
비비추는 풀이 아니라
새이려니 했다
아니면
작은 마추픽추 같은 건 아닐까 해서
비비추 비비추 계속 길게 발음하고 나면
잉카제국의
어느 언덕에 서 있는 것 같고
소리란 존재의 울림이지 싶기도 해서
비비추 비비추 다시 발음하고 나면
보랏빛 종같은 비비추 꽃이
보라 보다 내 눈을 사로잡는 거였다
나는 풀꽃이야
나는 너를 비추지 비추지
먼 것과 가까운 것
자꾸 웃어야 웃을 일이 생긴다기에
나는 자꾸 웃었더랬습니다
그래도 울 일이 더 많았습니다
아무래도 내가 덜 웃었던 모양입니다
자꾸 좋은 말을 해야 복 받는다기에
나는 자꾸 좋은 말을 했더랬습니다
그래도 나쁜 일이 더 많이 생겼습니다
아무래도 내가 더 좋은 말을 못했던 모양입니다
자꾸 베풀어야 좋은 일이 생긴다기에
나는 자꾸 주었더랬습니다
그랬더니 웃을 일이 더 많이 생겼습니다
아무래도 그동안 내가
먼 것과 가까운 것을 자꾸 구별했던 모양입니다
문제는 문제다
옷장에 옷을 쌓아놓고도
입고 나갈 옷이 없다고 투덜거리는
냉장고에 음식을 잔뜩 쟁여놓고도
먹을 게 없다고 칭얼대는
교통편을 이용하면서도 늘 바빠서
시간이 없다고 한탄하는
우리의 진짜 문제는
궁핍이 아니라 과잉이다
오늘도 우리는
과잉의 늪에 발이 빠진다
언제쯤에나
내 안에 잠자는 거인을
깨울 수 있을까
사람들
발자국 남기지 않으려고
뒷걸음치며 비질한 사람이 있다
그림자 밟지 않으려고
햇빛 마주보며 걸어간 사람이 있다
나는 매일 나 자신을
만들어야 한다고 외친 사람이 있다
그들은 자신을 비춰보는 거울의 다른 이름
지나온 생 돌아보며
밀려오는 슬픔 이기려고
마음의 맷집을 키운 사람이 있다
내가 만약
나라는 것을 조금이라도 안다면
그건 분명 사람들 때문이다
• 심상옥의 시세계
사물과의 오랜 친화를 통해 가 닿는 심미적 긍정의 언어
유성호
(문학평론가, 한양대학교 국문과 교수)
1.
이 가파른 속도전의 시대에 우리가 아직도 단정하고 함축적인 서정시를 쓰고 읽는 것은, 흘낏 지나칠 법한 우주적, 사회적 진실에 동참하려는 강렬한 미학적 의지 때문일 것이다. 개인적 차원에서는 자신의 구체적 경험과 기억을 토로하고 세상에 내놓음으로써 삶에 새로운 충격과 탄력을 부여하려는 어떤 열망 때문이기도 할 것이다. 이러한 각별한 의지와 열망은, 나날의 일상이 가질 법한 순환적 무의미함에 인지적, 정서적 변형을 새롭게 가함으로써 스스로를 반성적으로 사유하고 치유해갈 수 있는 창조적 에너지를 부여하는 데 그 의의가 있다고 할 수 있다. 이것이 바로 서정시를 쓰고 읽는 가장 보편적인 욕망이자 이유일 것이다. 이때 이러한 의지와 열망의 순간을 기록해가는 내재적 원리를 우리가 ‘서정’이라는 말로 집약할 수 있다면, 서정의 원리는 남다른 경험의 기억과 토로 그리고 그것을 통한 반성적 사유의 연쇄에서 가능한 것일 터이다.
심상옥(沈相玉) 시인의 신작시집 ?지금 오는 이 시간?은, 이러한 서정의 원리를 가장 고유하고 근원적인 차원에서 충족해간 미학적 결실이다. 이 시집은, 마치 서정의 원적(原籍)처럼 시인의 마음에 가라앉아 있던 소중한 기억들을 진정성 있게 표현하고 담아냄으로써, 시인으로 하여금 자신의 삶을 깊이 성찰하게끔 하는 상상적 도록(圖錄)이기도 하다. 시인 스스로 “자연에 순응하고/긍정하는 생의 진실은 더없이 아름답다”(「시인의 말」)라고 말했듯이, 이번 시집을 규율하는 내재적 힘은 사물과의 오랜 친화를 통해 가 닿는 심미적 긍정의 언어에 있다. 이처럼 자신의 내면에서 가득 출렁이는 기억들에 의해 발원하는 심상옥 시인의 시세계는, 지상의 소중한 이들을 향한 사랑의 마음과 그들과 공유했던 눈부신 순간들에 대한 매혹의 언어에 의해 뒷받침되고 있다. 그래서 심상옥 시인의 이번 시집은 과거에 대한 회감(回感)을 바탕으로 하면서 시인 자신의 경험에 대한 절실한 고백을 이어감으로써 미학적 완성도를 높여가고 있는 세계로 다가오고 있다 할 것이다. 이제 우리는 심상옥 시집을 통해 시인이 자신의 존재론적 기원을 상상하는 과정을 읽어내는 동시에, 그 시편들이 구체적 경험의 결을 통해 모두의 영혼을 충일하게 하는 미학적 비전(vision)으로 가득 차 있음을 알게 될 것이다. 이제 그 세계 안쪽으로 천천히 들어가 보도록 하자.
2.
두루 알려져 있듯이, 서정시는 시인 스스로 자신의 삶을 돌아보고 성찰하고 표현해가는 고백적 언어예술이다. 그래서 그 심층적 동기는 절절한 자기 확인 과정에 놓여 있게 되고, 나아가 시인들은 이러한 자기 확인 과정에 따르는 반성적 사유를 독창적으로 생성해가게 된다. 이처럼 서정시는 절실한 자기 탐구 결과를 함축적 언어에 얹어 세상에 내놓음으로써, 일견 나르시스적인 도취로 나아가기고 하고, 일견 구체적 경험을 통해 독자들로 하여금 사유의 성층(成層)을 한결 더 두텁게 해가게끔 해주기도 한다. 그러한 미학적 성층이 바로 서정시를 읽음으로써 얻게 되는 독자로서의 구체적 결실인 셈이다. 우리가 심상옥 시편을 통해 얻는 가장 중요하고도 일차적인 결실은 시인이 표현해가는 삶의 중용적 지혜라는 성층일 것인데, 이는 시인 특유의 균형 감각을 잘 보여주는 실례일 것이다. 먼저 다음 시편을 읽어보도록 하자.
밀봉과 개봉 사이
고배와 축배 사이에 간격이 있고
질문과 대답 사이
물음표와 마침표 사이에 간격이 있네
가치와 사치 사이
생각과 행동 사이에 간격이 있고
아침과 저녁 사이
꿈과 현실 사이에 간격이 있네
나무와 나무 사이
사람과 사람 사이에 간격이 있고
이곳과 저곳 사이에 간격이 있네
모두가 간격을 말할 때
너와 나 사이에도
간격이 있다는 걸 알겠네
간격이 있어야
더 잘 보이는 타인들 사이
- 「간격」 전문
대체로 ‘사이’란, 어떤 두 개의 사물이나 관념의 중간지대를 말한다. 그래서 ‘사이’는 물리적인 가운데를 뜻하기도 하고, 여러 편향들을 균형적으로 조정한 차원을 함의하기도 한다. 심상옥 시인은 모든 대립적인 사물이나 관념의 ‘사이’를 사유하고 탐침함으로써, 그 사이에 있는 ‘간격’이야말로 우리의 삶을 지탱해주는 더없는 균형추임을 강조해마지 않는다. “밀봉과 개봉”, “고배와 축배”, “질문과 대답”, “물음표와 마침표”의 ‘사이’를 주목함으로써 거기 있는 ‘간격’이 우리 삶의 중요한 실체임을 깨달아가는 것이다. 나아가 “가치와 사치”, “생각과 행동”, “아침과 저녁”, “꿈과 현실” 사이는 물론, “나무와 나무”, “사람과 사람”, “이곳과 저곳”의 사이에도 맞춤한 ‘간격’이 있음을 발견한 시인은, 이 모든 ‘간격’이야말로 “너와 나” 사이는 물론 “타인들 사이”까지도 환하게 보이게끔 하는 호환할 수 없는 삶의 조건임을 에둘러 말하고 있다. 그렇게 심상옥 시인은 다양한 실물적 사례를 통해 사물이나 관념 사이에 있는 ‘간격’이 바로 “살아있는 모든 것들을 이어주는 화음”(「저 황금나무」)임을 노래하면서, “어둠과 빛의 행간에”(「휴식」) 존재하는 자신의 삶을 투명하게 바라보고 있다. 그럼으로써 균형과 정제(整齊)의 사유를 수행해가는 자신의 시쓰기 과정을 환하게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다음 작품에서 시인은 이러한 사유의 실마리가 그동안 겪어왔던 숱한 ‘위기의 날들’ 때문에 가능했다고 고백하고 있다.
버드케이지란 나무는 약간의 그늘만 만나면
뿌리를 내리고 이슬을 받아 살아간다고 한다
노랑부리할미새는 기린의 등에 매달려
진드기를 잡아먹고 살아간다고 한다
휘파람을 불지 않고는 저 언덕을
내려갈 수 없었을 것이라고 너는 말한다
이름 모를 풀에 이름을 지어주고 싶은 마음이
나를 살아가게 했다고 나는 말한다
꽃을 본 적도 없이
어느 사이 꽃들이 분분하게
흩어져 버렸을 때
어제와 같은 오늘을
살지 않겠다고 다짐하던 날들이
내게는 있었다
시련의 끝에서 보면
우리의 웃음은
눈물에서 태어났다고 한다
― 「위기의 날들」 전문
누구나 생의 위기국면을 겪게 마련이지만, 때로 그것은 삶의 자양이 되어주기도 하는 역설을 우리는 종종 경험하곤 한다. 심상옥 시인은 “버드케이지란 나무”와 “노랑부리할미새”의 사례를 들어, 그네들이 처한 난경(難境)들이 오히려 더없는 삶의 조건이 되는 역설을 들려준다. 마찬가지로 휘파람을 부는 순간이 언덕을 내려가게끔 해주었고, “이름 모를 풀에 이름을 지어주고 싶은 마음”이 삶을 가능하게끔 해주었다고 힘있게 고백한다. 미처 보기도 전에 꽃들이 분분하게 흩어져 버렸을 때 “어제와 같은 오늘을/살지 않겠다고 다짐하던 날들”은, 비록 그것이 ‘위기의 날들’이었을지라도, “시련의 끝에서 보면/우리의 웃음은/눈물에서 태어났다고” 하는 사실을 알게 해주었던 것이다. 이어지는 ‘웃음’과 ‘눈물’의 대위(對位) 역시 위기를 바탕으로 삶을 꾸려왔던 시인의 힘겨웠지만 아름다웠던 시간을 구체적으로 알려준다. 그래서 심상옥 시편은 “새로운 삶의 비밀을 발견하기 위해”(「먼동」) 가장 구체적인 발견과 깨달음의 과정을 노래하면서, 그것을 중용과 역설의 언어로 표현해간다.
이렇게 심상옥 시인의 목소리는 ‘사이’ 혹은 ‘간격’의 상상력을 통한 역설의 시학으로 귀결되어간다. 세계내적 존재로서 필연적으로 가질 수밖에 없는 존재론적 슬픔에 초점을 맞추면서도, 그러한 힘겨운 조건을 중용과 역설의 지혜로 돌파해가는 사유의 과정이 거기 가득 펼쳐져 있다. 존재의 엄연한 한계 속에서 오히려 궁극적 자기 긍정으로 전화(轉化)해가는 내적 계기들을 풍부하게 만들어내는 것이다. 예컨대 그것은 삶에 대한 외경과 믿음을 통해 만들어지는 것일 터인데, 시인은 꽃 하나에 대한 미적 동경에서 그것을 찾기도 하고, 사람들의 따뜻한 마음에서 그러한 징후를 탐구하기도 한다. 이 모든 것이 중용과 역설의 감각을 가진 이번 시집이 보여주는 구체적 면모일 것이다.
3.
우리가 잘 알듯이, 이미 지나가버린 시간에 대한 기억은 시 창작의 제일의적 수원(水源)이다. 그만큼 서정시는 부재하거나 결핍된 것들을 상상적으로 재현하면서, 그러한 시간을 되돌릴 수 없다는 감정에 의해 씌어진다. 어쩌면 그러한 ‘부재하는 현존’ 자체가 인간의 존재방식을 그대로 담아내는 기억의 운동이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물론 우리는 그 과정에서 ‘기억’이라는 것이 단순한 과거 사실의 재현에 멈추지 않고, ‘지금 여기’를 살아가는 우리의 현재형에 의해 구성되는 것이라는 점을 잘 알고 있다. 그 점에서 심상옥 시인의 기억 시편들은 시인 자신의 현재형과 깊이 닮아 있는 셈이고, 오래도록 자신의 육체 안에 새겨놓았던 소리들이 집중적으로 발화되는 다음 시편은 그러한 기억과 현재형의 긴장과 상합(相合) 과정을 잘 보여준다 할 것이다.
솔바람 서로 부대끼는 소리 적막하다
환한 축복 같던 목련 지는 소리 적막하다
구성진 새울음이 멀어져가는 소리 적막하다
숨어서 우는 풀벌레 소리 적막하다
수직으로 내리는 겨울비 소리 적막하다
소리도 없이 눈이 휘날리는 소리 적막하다
아무것도 확실한 게 없다는 탄식소리 적막하다
지나간 천년보다 하루가 더 길다는 절박한 소리 적막하다
마음의 맷집이 느슨해지는 소리 적막하다
내가 원하는 것들이 내게서 멀어지는 소리 적막하다
내 발걸음이 나를 옮겨가는 소리 적막하다
한 번도 내 것이 아니었던 것들이 적막하다
― 「적막하다」 전문
이 아름다운 시편은, 여러 차원의 ‘소리’들을 경험적으로 살려내면서 그것들이 이제는 눈앞에서 사라져버렸고 지금에는 ‘역동적 고요’로서의 ‘적막함’으로만 남아 있음을 노래한다. 이 또한 ‘소리/ 적막’의 사이에 있는 ‘간격’을 궁구하는 시인의 균형 감각이 살아 있는 실례에 속할 것이다. 끝없이 환유될 것만 같은 이러한 “세상의 모든 소리”(「귀여 들어라」)들의 흔적은, 가령 “솔바람 서로 부대끼는 소리”로부터 시작하여 “목련 지는 소리”, “새울음이 멀어져가는 소리”, “풀벌레 소리”, “겨울비 소리”, “눈이 휘날리는 소리”로 한없이 하나 하나 연쇄되어 나간다.
이러한 계절 운행에 따른 자연 사물들의 빛나는 ‘소리’들은 이제 온전한 ‘적막함’ 속에 잠겼다. 아니 ‘적막함’으로 몸을 바꾸어간다. 이와는 반대로 “탄식소리”나 “지나간 천년보다 하루가 더 길다는 절박한 소리”, “마음의 맷집이 느슨해지는 소리”, “원하는 것들이 내게서 멀어지는 소리”, “내 발걸음이 나를 옮겨가는 소리” 같은 것들은 모두 인간의 것인데, 이네들은 자연 사물의 것과는 달리 어떤 존재론적인 슬픔과 우수(憂愁)를 그 안에 깊이 담고 있다. 그렇게 “한 번도 내 것이 아니었던 것”들이 이제는 ‘적막함’에 감싸인 채로 시인의 기억 속에 깊이 잠겨 있는데, 이처럼 오래도록 자신의 육체 안에 새겨놓았던 소리들이 오랜 기억과 현재형 사이의 긴장과 상합 과정을 보여주면서 발화되고 있다. 결국 심상옥 시인은 “소리를 잘 들어주는 귀명창이/ 명창을 만들어 내듯이”(「일상에서 일생까지」) 예민한 감각으로 지나가버린 ‘소리’들의 ‘적막함’을 구성함으로써 “소리란 존재의 울림”(「비비추」)이라는 사실을 미학적으로 증언하고 있고, 깊은 근원의 소리를 채록해가는 것이 시인으로서의 직임(職任)임을 잘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바람은 종을 때리고
추억은 가슴을 친다
종소리 멀리 퍼져 범종이 되나
추억은 인생이 지나는 길목에서
여린 휘파람 소리를 낸다
풀밭에 누워
시를 외던 시절은 지나간 것이냐
지금 오는 이 시간은
잃어버린 것들을 만나러 서성인다
또 한 편의 시절이
재생되는 것이냐
나는 하루를 적지 않기로 한다
― 「지금 오는 이 시간」 전문
이번 시집의 표제작이기도 한 이 시편은, 오랜 기억을 재현하면서도 ‘지금 여기’의 삶을 더욱 사랑하며 살아가는 시인의 넉넉한 품을 잘 보여준다. 기본적으로 이 시편의 얼개는 남다른 ‘추억’에서 시작한다. 그 ‘추억’은 시인의 가슴을 치면서 삶의 길목마다 “여린 휘파람 소리”를 낸다. 그 대상은 한편으로는 “풀밭에 누워/시를 외던 시절”이지만, 그것은 “지금 오는 이 시간”에 자리를 비켜주면서 시인으로 하여금 “잃어버린 것들을 만나러” 서성이게끔 하기도 하는 기억의 힘이기도 하다. 그렇게 “지금 오는 이 시간”은 “또 한 편의 시절이/ 재생되는” 순간이기도 하니, 시인으로서는 “오늘 하루”를 굳이 적지 않기로 마음먹는다. “아주/ 오랜 시간이 흐른 다음”(「옛 수첩에서」)에 비로소 찾아오는 추억의 힘을, 지금을 살아가는 재생의 힘으로 바꾸어 “사물들 곁에서 시작하는 나의 세계”(「나의 세계는 사물들 곁에서 시작한다」)를 생성해내는 것이 자신의 일임을 알기 때문이다.
이렇게 깊은 기억의 힘을 빌려 존재 생성의 빛나는 순간을 창조해내는 시인의 감각은 돌올하고 아름답다. 이는 서정시가 구현하는 ‘기억의 연금술’로서의 속성을 여지없이 충족하면서, 그 충실한 힘을 통해 가장 깊고 오래된 인간의 감각을 유추해내는 과정을 천천히 밟아간다. 그럼으로써 심상옥 시인은 ‘소리’의 부재를 통한 ‘적막함’에 가 닿는 감각을 보여주기도 하고, ‘지금 여기’의 힘으로 추억을 변화시키는 사유를 보여주기도 한다. 그렇게 시인은 ‘기억’이라는 것이 호환할 수 없는 서정시의 핵심적 기율임을 재차 선명하게 입증해간다. 그 발길이 한편으로는 경쾌한 산책으로 나아가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아득한 심연을 향하기도 한다.
4.
다시 한 번 강조하지만, 서정시는 시인 자신의 민감하고도 세심한 상상력을 통해 일상에 편재(遍在)한 불모와 폐허의 기운을 넘어서 새로운 인생론적 활력을 생성해내는 언어예술이다. 심상옥 시인은 자연 사물에 대한 섬세한 관찰과 묘사, 그리고 자신의 기억에서 일어나는 생명의 역동성에 대한 충실한 재현 과정을 통해 서정시의 이러한 다양한 속성을 풍요롭게 보여준다. 물론 심상옥 시편은 생성의 밝음뿐만 아니라 소멸의 어둑함까지 암시해가는 복합성의 세계를 선호한다. 우리의 삶이 쉽게 단선적으로 해석되는 것이 아니라 재해석의 가능성을 무궁하게 가지고 있는 실체임을 형상화해가기 때문이다. 그렇게 이번 시집은 세상의 표면에서 펼쳐지는 가파른 속도나 휘황한 감도(感度) 대신, 사라져가는 존재자들의 심미적 잔상(殘像)을 소중하게 담아냄으로써 어떤 근원적 존재를 향한 마음의 흐름을 아름답게 보여주고 있다 할 것이다.
새 길이 옛 길을 내려놓을 때
추억을 통해 인생이 지나갈 때
바람이 손가락에 잡힐 때
그때가 소중하다
새 날이 지난날을 읽을 때
미로를 통해 방황이 끝날 때
구름이 생각 끝에 머물 때
그때가 소중하다
첫 질문이 다음 페이지를 쓸 때
시작을 통해 끝이 서럽지 않을 때
물결이 마음결에 닿을 때
그때가 소중하다
― 「그때가 소중하다」 전문
심상옥 시인은 자신의 기억을 새삼 되살리면서 손에 잡힐 듯한 소중한 시간들을 차근차근 배열하고 있다. 내면 깊이 소중하게 각인되어 있는 그때 그 순간은, 비록 많은 이질적 속성들을 구유(具有)하고 있다 하더라도, 한결같이 “새 길이 옛 길을 내려놓을 때”로부터 시작하여 “물결이 마음결에 닿을 때”까지를 모두 포괄하는 지속성과 연쇄성을 보여준다. 하지만 그 소중함이란 대체로 ‘시작’과 ‘끝’을 제대로 각인하고 나서 얻어지는 어떤 힘과 연관되는데, 말하자면 “새 날이 지난날을 읽을 때”나 “시작을 통해 끝이 서럽지 않을 때”가 시인이 생각하는 삶의 출발점이자 귀착지인 셈이다. 이러한 ‘출발점/ 귀착지’의 동일성이야말로 시인으로 하여금 존재자들의 심미적 잔상(殘像)을 소중하게 담아냄으로써 어떤 근원적 존재를 향한 마음의 흐름을 가지게끔 하는 원질(原質)로 작용하고 있다. 그 소중함이 “나보다 낮은 곳에 물이 있고”(「나는 움직인다」), “인생에서 너무 늦은 일 따위는 없다”(「예이츠가 모드곤에게」)는 사실을 새삼 알려주는 것이다. 기억의 잔상에서 퍼져 나오는 마음의 현상학이 이렇게 소중하게 완성되고 있는 것이다.
노을이 자라면 무엇이 될까
노을 지는 나이에
내가 나에게 묻는다
붉은 한숨을 토하겠지
한숨을 쉬면 어디까지 갈까
한숨 쉬는 나이에
내가 나에게 묻는다
마음 따라 가겠지
마음이 자라면 무엇이 될까
마음뿐인 나이에
내가 나에게 묻는다
마음이 있으니까 사람이 보이겠지
사람이 보이면 어떻게 될까
사람 보이는 나이에
내가 나에게 묻는다
오래 사랑한 사람을 놓아주기로 결심한 사람처럼
나는 울었다
― 「나에게 묻는다」 전문
심상옥 시인은 스스로에게 삶의 비의(秘義)를 거듭 묻고 있다. ‘노을’과 자신을 동일시하면서 과연 “노을이 자라면 무엇이 될까”를 묻고는, “붉은 한숨”으로 가 닿게 될 그 다음의 시간을 생각한다. 그리고 그 한숨은 마음을 따라 갈 것이고, 마음이 자라면 사람이 보이는 지극한 성숙의 시간을 가져다줄 것이라고 믿으면서, “오래 사랑한 사람을 놓아주기로 결심한 사람”이 되어 끝내 울음을 터뜨렸던 기억을 환하게 떠올리고 있다. 시인은 그렇게 “마음은 바닥을 쳐도”(「하루도 긴 여름」) 생을 견결하게 이어왔고, 또 그렇게 “누구든 바닥은 있는 것”(「나그네새」)을 잘 알고 있기에 삶의 여러 굴곡이나 침전에 대해서도 자신의 마음을 넓게 열 수 있었을 것이다. 비록 “이제야 아는 걸/ 그때도 알았더라면”(「왜 몰랐을까」)이라고 짐짓 아쉬워하는 경우도 있지만, 시인은 가장 깊은 의미에서의 인생론적 성숙의 모습을 강렬하게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사실 우리가 지각하고 유추해낼 수 있는 삶의 시간(성)이란, 한동안 그것이 사물들을 규율하다가 사라져가는 곳에서 역설적으로 생겨나게 마련이다. 하지만 한편으로 그러한 소멸 형식은 또 다른 차원의 존재론적 생성을 준비하는 필연적 단계이기도 하다. 아니 소멸해가는 사물들의 안쪽에 이미 생성의 기운이 충실하게 잉태되어 있다고 해도 틀린 말은 아닐 것이다. 이 모든 것이 우리가 그냥 홀로 살아가는 단독자(單獨者)가 아니라, 숱한 생성과 소멸의 과정을 통해 의미를 획득해가는 상호 결속의 존재자임을 잘 알려준다. 심상옥 시인은 이러한 삶의 상호 의존적인 역리(逆理)들을 적극 발견하면서 그 결실을 자신의 삶에 수용해가고 있는 것이다.
5.
마지막으로 심상옥 시인의 이번 시집에서 우리가 만날 수 있는 음역(音域)은, 대상을 향한 가없는 사랑의 몫이다. 이때 시인은 타자들과 적극 친화하면서 그 소통의 결과를 은은하고도 깊은 파동으로 옮겨놓는 세계를 흔연하게 보여준다. 우리는 심상옥 시편을 통해 사물을 통한 깨달음을 함께 경험함으로써, 그만이 가지는 시인으로서의 자의식을 섬세하게 만나게 되는 것이다. 물론 그러한 깨달음과 자의식의 경험을 매개하고 표현하는 원리는, 삶의 저류(底流)에 흐르는 본질적 고갱이들을 순간적으로 파악해내는 힘에서 비롯하는 것일 터이다. 그만큼 심상옥 시편에는 역동적 상상력과 감각이 다양한 문양으로 가득 펼쳐져 있고, 우리는 그러한 상상력과 감각을 구성하는 일차적이고 직접적인 제재가 자연 사물일 것이라고 생각해본다.
산은 그 자리 그대로 있는데
사람들은 오르락내리락 하네
나무는 그 자리 그대로 있는데
사람들은 바람처럼 흔들리다 말다 하네
꽃은 그 자리 그대로 피는데
사람들은 나비처럼 이 자리 저 자리 옮겨 다니네
흐르는 물은 앞을 다투지 않는데
사람들은 다투면서도 흐르지 못하네
그 자리에 그대로
그것보다 더 못 말리는 되풀이가 있을까
움직이는 것들 그보다 더
반복되는 되풀이가 있을까
아무려면 어떤가
내가 바라보는 자연은
온전히 나만의 것
그 자리 그대로
나도 내 자리에 그대로
― 「되풀이 일기」 전문
온전하고도 진득하게 자신의 자리를 지키는 것들은 ‘산/ 나무/ 꽃/ 물’ 같은 자연 사물의 세목이다. 그런데 그것들과는 달리 늘 오르락내리락 하고, 흔들리고, 옮겨 다니고, 다투면서도 흐르지 못하는 것은 ‘사람’들의 몫이다. 이러한 ‘자연/인간’의 확연한 대조 속에서 시인은, “그 자리에 그대로” 있는 자연 사물의 위대한 되풀이를 생각해본다. 시인이 바라보는 자연은 그렇게 “온전히 나만의 것”이 되어 “그 자리 그대로” 있는 것들이다. 그러니 시인으로서는 “나도 내 자리에 그대로” 있기를 암암리에 희원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이때 시인은 “오직/ 햇빛과 바람과 물과 새소리만으로/ 하루를 채울 수”(「나의 세계는 사물들 곁에서 시작한다」) 있기를 기원하고, 나아가 “마음이 먼저/ 옮겨 적은 문장들”(「옛날 같은 여름이」)이 이미 자연 속에 있었음을 깨달아간다. 이제는 “그 까닭을 알 듯하여”(「겁 없이 겁도 없이」) 더더욱 자연 속으로 나아가면서 “누가/ 내 심장 위에다/ 천둥소리 옮겨”(「하루가 길다」)놓은 그러한 원리를 따라 가장 자연스러운 삶을 발견해가는 것이다. 이러한 ‘되풀이 일기’를 쓰면서 심상옥 시인은 자신의 삶에 대한 지극한 사랑의 원리를 되살피고 있는 것이다.
별들이 드리운 밤을 눈앞에 보며
나는 처음으로
세상의 다정한 무관심에 대해
마음을 열고 있었다
초록나무 위에서 지저귀는 새소리를 들으며
나는 처음으로
사람들의 무관심에 대해
마음을 열었다
마음에도 문이 있어 활짝 열었더니
닫혀 있는 벽도 활짝 열렸다
나는 처음으로
한 떨기의 별과
한 번의 새소리 사이에서
꽃 같은 미소를 자아내었다
― 「마음에도 문이 있어」 전문
마음에도 문이 있어서 시인은 그 문을 열어젖힌 채 뭇 타자들을 받아들인다. 시인은 “처음으로/ 세상의 다정한 무관심에 대해/ 마음을 열고” 있음을 고백하는데, 그 고백을 가능하게 한 것은 “별들이 드리운 밤”과 “초록나무 위에서 지저귀는 새소리” 같은 자연 사물이다. 문을 열었더니 “닫혀 있는 벽도 활짝” 열리고 마침내 시인은 처음으로 “한 떨기의 별과/ 한 번의 새소리” 사이에서 “꽃 같은 미소”를 얻게 되었다고 고백하는 것이다. 문을 여니 비로소 닫혀 있는 것들도 따라 열리는 과정을 통해 시인은 “파괴함으로써 나는 창조한다”(「나의 도예법」)는 자신의 시법(詩法)을 선명하게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사랑이/ 때때로/ 무위(無爲)”(「때때로」)로 이어질지라도 “세상은 살아낼 수밖에 없는 곳”(「휴식」)이기 때문에 시인은 자신의 시세계가 견고한 견딤의 힘을 스스로에게 주게 되기를 바라마지 않는다.
결국 심상옥 시인은 이러한 애잔하고도 아름다운 목소리를 통해 현실에서는 불가능한 상상적인 존재 전환을 선연하게 수행해간다. 하지만 시인의 이러한 사유와 감각이 비현실적인 몽상이나 판타지로 이루어진 것은 결코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시인으로 하여금 일상 현실을 벗어나 전혀 다른 상상적인 미학적 거소(居所)를 예비하면서도 궁극적으로는 지상에서 살아가는 이들의 존재방식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이게끔 인도해가는 것이다.
서정시라는 배타적인 장르 규정이 그 효용성과 타당성을 계속 견지해간다면, 우리는 서정시의 존재조건을 이루는 근거가 ‘인간’에 대한 항구적인 질문이 될 것이라고 믿는다. 또한 서정시는 언어를 통해 언어의 제약으로부터 벗어나려는, 언어를 씀으로써 언어를 쓰지 않으려는 역설에 그 존재의 영역을 드리우게 될 것이다. 따라서 최소의 언어를 통해 새로운 의미 충전을 이루어가는 것 외에 서정시의 존재조건을 설명할 도리는 따로 없을 것이다. 심상옥 시편은 이러한 인간에 대한 질문과 언어경제학의 충전 과정을 수려하게 보여주는 실례로 남을 것이다.
문학이 상품 미학의 옷을 입고 떳떳하게 생산되고 유통되어가는 이 시대에, 문인들조차 문화 산업의 중요한 성원임을 자발적으로 선언해가는 이 시대에, 이러한 질문과 충전 과정은 서정시의 정체성에 대한 본원적 탐구 과정과 여지없는 등가를 형성해갈 것이다.
이번 시집을 통해 우리는 심상옥 시인이 들려준 근원의 소리와 함께, 그가 채록해가는 심미적 긍정의 언어를 한없는 빛으로 경험한다. 그 순간 우리는 서정시의 존재 의의가 생동하는 깨끗하고도 단정한 범례(範例) 하나를 얻게 될 것이다. 그리고 사물과의 오랜 친화를 통해 가 닿는 심미적 긍정의 언어를 성취한 심상옥 시인이, 이 개성적 결실을 딛고 넘어서면서 더 넓고 깊은 서정적 진경(進境)으로 나아가는 것을 두고두고 바라보게 될 것이다.
심상옥沈相玉 약연보
․1945년 일본 도쿄 출생
․경남여고, 이화여대 사범대학교육학과, 동아대학 교육대학원미술교육과 졸업
․중국중화학술원 위원(예술박사), 일본草月조형학교(사범3급 취득)
․부산대학, 계명대학, 상명대학, 대만실천전과대학, 중국중앙공예미술대학 강사 역임
․도예개인전 18회, 국내외 그룹전 30여 회
․1982년 ?한국수필? 조경희 선생 추천으로 수필등단
․1982년 시․수필집 ?그리고 만남?(신기원사: 이봉래 운영) 시 데뷔
․1984년: 8인 수필집 ?푸른 계절을 위한 대화?
(황정환, 이숙, 김환득, 한영자, 심상옥, 박복조, 송영옥, 김해자)
․1992년; 황금찬 외 8인 ?시가 있는 모짜르트 카페?
(황금찬, 성기조, 문효치, 윤종혁, 장윤우, 김선, 김양식, 심상옥, 권일송)
․1994년: 한국문학작품선 ?시드니 항만에서?(문체부 출판)
․시집: ?울림과 색깔의 합주?, ?오늘과 내일 사이?, ?지금 오는 이 시간? 등
․수필집: ?화신?, ?환상의 세계를 넘어서?, ?마음의 불을 지피고?, ?더 큰 자연을 연주하며?, ?공간에 색깔 입히기?, ?미녀와 마녀?, ?합주合奏?, ?한 송이 꽃을 피우기 위하여? 등
․논문집: 「조선조 삽화에 나타나는 공간미술 연구」(석사 논문)
「조선시대 화기에 나타난 공간 입체」(박사 논문)
․수상: 한국문학상(2016년), 한국여성문학인상(2014년), PEN문학상(2013년), 노산문학상(2009년), 조경희한국수필문학상(2001년), 문인협회동포문학상(1996년), 허난설헌문학상(1997년) 등 다수
․경력
․PEN문학 주간 역임, 한국수필가협회 부이사장 역임
․PEN문학상 수필부문 심사위원(2015년)
․세종도서문학나눔 심사위원 추천위원회 위원(2015년)
․PEN감사패(2015년)
․세계한글작가대회 집행위원; PEN공로패(2016년)
․현재; 한국현대시인협회 이사 및 대외협력위원회 위원장
한국여성문학인회 부이사장, 한국문인협회 자문위원
국제PEN한국본부 이사, 계간문예작가회 이사
문학시대 기획상임위원
1판 1쇄 인쇄/ 2018년 10월 20일
1판 1쇄 발행/ 2018년 10월 25일
지은이 / 심상옥
펴낸곳 / 도서출판
등록∥1993년 5월 15일 제3001-1993-151호
주소 03068 서울 종로구 성균관로 5길 39-16
전화∥(02)765-5663
값 12,000 원
*잘못된 책은 바꿔 드립니다.
ISBN 978898387?312?5 038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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